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5세 (문단 편집) == 개인사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99px-Koning_Louis_XV%3B_Hyacinthe_Rigaud.jpg|width=300]]}}} || || 루이 15세, 이아생트 리고, 1730년 || 지식과 교양도 상당했고 두뇌도 비상했다고 전해진다. 가정교사 방타두르 부인의 엄격한 교육 탓에 어렸을 때는 에티켓과 배려에 세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7세 때 프랑수아 드 뇌빌 드 빌레루아[* [[라미예 전투]]에서 [[존 처칠]]에게 패배한 그 빌레루아 맞다. 이후 빌레루아는 패장임에도 불구하고, 루이 14세와의 인연때문에 궁정 조신으로 살다가 루이 15세의 섭정 중 한 명이 되었지만 [[필리프 2세(오를레앙)|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에 의해 추방되었다.]에게로 넘어가면서, 끝없는 공식적 행사 및 소심함을 감추는 능력과 미학, 정치학을 배우는 등 제왕 교육을 받았다. 문화적인 안목도 상당해서, 루이 15세의 치세에 [[로코코]] 문화가 등장했다. 로코코 문화는 다음 대인 [[마리 앙투아네트]] 시대에 절정기를 맞이했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이했다. 굉장한 [[미남]]으로 당시 '[[유럽]] 제일의 미남자'라는 평판을 얻을 정도였다.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한]][* 15세에 결혼했는데 7세 연상인 왕비와 첫날밤 8번이나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이었으며, 유명한 그의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마담 드 퐁파두르]]나 《[[베르사이유의 장미(만화)|베르사유의 장미]]》에도 등장하는 [[뒤바리 부인]] 등 많은 여자들을 섭렵했다. 심지어 2명도 아닌 3명을. 참고로 이들은 넬 후작의 딸들로 모두 5자매였는데 이 중 3명은 '공식적'이었고, 나머지 2명에 대해서도 추문이 제기된 바 있다. 자세한 건 [[루이즈 쥘리 드 마이넬]] 문서 참조. 어머니를 일찍 잃은 탓인지 '''[[가슴]] 크기'''에 집착했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는 소녀를 밝히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며느리를 고르는 것에서도[* 참고로 첫 번째 며느리는 삼촌인 [[펠리페 5세]]의 딸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였는데 항렬상 사촌인 루이 15세보다 무려 16살이나 어렸고, 두 번째 며느리인 마리아 요제파는 [[에스파냐]]의 사촌 동생 [[카를로스 3세]]의 처제였다.] 가슴을 보지 않은 신하에게 푸념을 한 적이 있었다. 인성은 나쁘지 않아 개인적으로는 자상하고 관대한 성격으로, 아침 일찍 일어날 때면 시종들을 깨우기가 미안해서 손수 [[커피]]를 타서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또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해서 대신 한 사람을 자르려고 불렀는데 눈치를 못챈 그 신하가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는 바람에 끝내 구두로 사직을 명하지 못하고 글로 써서 그 신하의 사무실로 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덕분에 애첩 퐁파두르 부인이 곁에 같이 있다가 왕의 안색을 살펴서 적절한 선에서 상대의 이야기를 자르고 내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어린시절 병으로 떠나보낸 가족들이 너무 많았던 탓에 죽음에 대해서 크게 두려워하는 면이 있었다. 종종 이러한 단어들을 입에 올려댔으며, 그럴 때마다 시종들이 달래기 일쑤였다고. 덕분에 퐁파두르는 사랑하는 딸을 잃었는데도[* 루이 15세의 첩이 되기 전 낳은 딸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루이 15세 때문에 아무말 못한 채 이틀만에 연회에 나타나 이를 본 귀족들이 동정 내지 경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일찍이 파르마로 정략결혼[* 같은 [[보르본 왕조]]인 스페인-프랑스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자기 사촌 동생에게 시집보냈다.]을 보낸 장녀 엘리사베타에게 항상 미안한 감정이 있는데다가, 2녀와 3녀가 연달아 요절한 탓에 [[팔불출|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끔찍했다]]. 자녀들이 아파서 치료받느라 비명을 지르면 안절부절 못했다고 한다. 특히 딸들의 요구를 모두 다 들어주었고, 결국 이 딸들은 프랑스를 떠나기 싫다며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모두 독신으로 남았다]]. 하여튼 [[딸바보|딸들의 어리광을 받아주면서]] 시집도 안 보내고 끼고 살아서 그랬는지 시중에는 왕과 그 딸들이 근친상간의 관계라는 악소문이 돌기까지 했다. 이건 앙리 4세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적인 부르봉 가문의 문란함도 있고, 왕실에 대한 민중의 불신도 한몫했을 것이다. 참고로 [[생 제르맹]] 백작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ie_Leszczy%C5%84ska%2C_reine_de_France_%28original_copy%29_by_Jean-Marc_Nattier.png]]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 15세의 나이로 7세 연상인 [[폴란드]]의 마리 레슈친스카 왕녀[* 다만 이 시점에서 그녀의 아버지 스타니스와프는 폐위되어 프랑스로 망명한 상태였다.]와 결혼했다. 하필 나라도 없는 공주인 그녀가 프랑스의 왕비로 선택된 이유는, 레슈친스키 가문에 대대로 자식이 많았기 때문에 왕위 계승자를 빨리 얻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유력한 후보 공주들이 [[거부권|심사위원들간 이해관계의 불일치로 떨어져나간 반면]] 그녀는 권력이 없다보니 이해관계와도 무관했고,[* 그러나 이는 결국 장인이 나라 없는 왕이란 사실이 본인의 체면에 먹칠을 한다고 생각한 루이 15세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폴란드 왕위를 두고 전쟁]]에 개입하면서 안좋은 쪽으로 작용했다.] 나라도 없는 공주를 왕비로 만들어주면 나중에 은혜를 갚을 거라고 기대했던 심사위원들의 욕심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기대하던 대로 레슈친스카는 10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 중 2명만이 아들이었고, 성인으로 성장한 것은 루이 페르디낭 뿐이었다. 초반에는 금슬이 좋았다고 하지만 얌전하고 순종적인 왕비에게 질린 모양인지 루이 15세는 오래지 않아 정부를 들였고, 종국에는 왕비도 바람둥이 남편과 항시적인 임신에 짜증나서 완전히 별거 상태가 되었다. 자녀들을 출산한 뒤로는 [[임파선염]]을 핑계로 잠자리를 거절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